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일스 데이비스 (문단 편집) === 쿨의 탄생 === 마일스는 뉴욕 시절에 비밥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동시에 당대 클래식 작품들의 공연이나 실험적인 연주를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밴드 음악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1946년에 만난 클로드 손힐 밴드의 편곡자 길 에반스(Gil Evans)가 마일스를 자신의 음악 활동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마일스도 에반스의 밴드 동료들이나 친구들인 [[게리 멀리건]], [[존 루이스]], [[조니 캐리시]] 등의 편곡자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 모임에서 손힐 밴드 같이 부드럽고 경쾌하면서도 종래의 [[빅 밴드]] 재즈와는 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새로운 밴드의 결성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는데, 다만 이들 모두 돈이 별로 없던 탓에 대규모 밴드를 만들기는 힘들었다. 토의 결과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이 [[리듬 섹션]]을, 알토 [[색소폰]]과 바리톤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 [[호른]], [[튜바]]가 [[혼 섹션]]을 이루는 노넷(9중주) 편성의 악단이 탄생했다. 노넷은 1948년 9월에 뉴욕의 로열 루스트 홀에서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재즈 연주자들이나 작곡가, 편곡자들에게는 꽤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흥행 면에서는 나쁜 신세를 면치 못했다. 빅 밴드의 조직적인 스윙을 좋아하는 팬들이건 비밥의 거칠고 격렬한 사운드를 좋아하는 팬들이건 이 음악은 물에 술탄 듯 미지근한 사운드의 느슨한 무드 음악 정도로 폄하됐고, 결국 로열 루스트에서 2주 계약으로 마련된 공연 외에는 공개 무대에서 연주할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때 청중들 중 스탄 켄턴 밴드의 편곡자였던 피트 루골로가 이 노넷을 캐피털 레코드에 소개했고, 이 음반사에서 1949년 1월 21일과 4월 22일, 1950년 3월 9일 세 차례의 세션을 통해 모두 열두 곡이 녹음되었다. 이 녹음들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The Birth of Cool이라는 이름의 LP로 정리되어 발매되었고, 이내 밥의 뜨거움에 대응하는 음악이라는 관념으로 고정되었다. 이 앨범으로써 [[쿨 재즈]]의 개념이 최초로 정리된 것이다. 다만 노넷 안에서도 뭔가 부족해 보이는 마일스의 리더 역량이나 편곡 개런티 분배 문제 등으로 이런저런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고, 흑인 뮤지션들은 이 곡이 너무 말끔한 백인 취향의 사운드로 변질된 재즈만 보여준다고 대차게 까기도 했다. 하지만 마일스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노넷의 주된 편곡자였던 에반스와 멀리건, 루이스 세 사람도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쿨 재즈 어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쿨이 어떤 의미로 이해됐던 간에 마일스의 유명세도 계속 높아졌고, 1949년에는 [[태드 다메론]]의 쿼텟(4중주단)과 함께 [[프랑스]]에서 생애 첫 해외 공연을 갖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잠시 보낸 몇개월간은 마일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재즈가 지식인들에게 높게 평가받던 음악이었기에 그는 [[파블로 피카소]]나 [[장폴 사르트르]] 등의 거물들이 참여하는 사교회에 초대되기도 했고, 삼엄한 인종분리가 시행되던 미국과 달리 본인을 피부색을 보지 않고 그저 예술가로서 평가하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에 데이비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미국에 돌아와 모국의 차가운 현실 앞에 데이비스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고, 또한 이미 신인 시절부터 손대기 시작한 [[헤로인]], [[코카인]]을 비롯한 마약이 경력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해, 1950년 가을에는 빌리 엑스타인 밴드의 드러머였던 [[아트 블래키]]와 마약을 하려다 걸려서 체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곳엔 헤들리 칼리먼이라는 색소포니스트가 수감중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마일스의 머리는 고슴도치처럼 위로 솟아있었으며 여느 헤로인 중독자들처럼 약을 끊으려 애를 먹던 중이었다고 한다.][* 다른 수감자들이 신고식으로 마일스와 아트에게 까딱하다가는 여기서 살해당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했고 마일스는 조금 울었다고 한다.] 비록 블래키가 마약이 몽땅 자기 꺼라고 해서 마일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내 여론은 마일스=[[약쟁이]]로 굳어져 버렸다. 실제로 이 때 마일스는 약기운에 헤롱대며 상당히 기복이 심한 연주를 보여주고 처지였고, 비평가들도 다시금 마일스의 약점을 이것저것 거론하면서 신나게 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밥을 적극적으로 녹음하던 소규모 음반사인 프레스티지와 1951년에 계약을 맺기도 했고, 이 음반사에서 알토 색소포니스트였던 재키 매클레인과 함께 '탐구(Dig)' 라는 수작 LP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결국 아들의 마약 남용 소식을 듣고 빡친 아버지가 강제로 세인트루이스로 그를 끌고 가면서 음악 활동도 잠시 중단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